태그 : 행복강박관념

항상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1.5집 - Sophomore Jinx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노래 / 포니캐년(Pony Canyon)
나의 점수 : ★★★★★




그리 불행하지만은 않았었지만
오,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1.5집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돼' 중에서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에 이미 패배주의를 몰고 온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의 1.5집 소포모어 징크스에는 ‘어차피 난 이것밖에 안돼’라는 비루하고 처절한 제목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20 대 개새끼론과 패배주의는 이미 많이 거론되어 행복론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이제까지의 현실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들던 것은 사회의 성공에 대한 강요도 아니고 획일화의 강요도 아니며 성공과 행복의 동일시도 아닌, 바로 행복의 강요였다.

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어디서나 빼놓을 수 없는 히트 아이템이었고 성공은 곧 행복이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인식은 나를 옭아맸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 인생의 마지막 목표는 행복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하면 소설 같은 거 안 쓰지.’라는 어느 교수님의 말 때문이기도 하고 그 흔하고 지독한 중2병의 말로이기도 했고 지긋지긋한 고질적 마이너병 탓이기도 했다. 끝없는 불행 속에 죽어간 기형도와 커트 코베인을 보며, 요절해버린 천재들을 보며 나도 저들처럼 되리라 마음 먹은 탓도 있었다. 어떤 유치한 이유에서건 나는 행복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학교에 대한 지독한 분노는 졸업, 아니 수능 시험의 종료와 동시에 행복하지 않은 내 안으로 향했다.

행복의 의무를 져버린 인간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받기 시작했다. 행복해야 한다고 강요하기에 행복하지 않기를 선택한 나는,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행복해야 하는지, 왜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고통받아야 하는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어떤 사람도 언제나 불행하지는 않고 언제나 행복하지도 않다. 행복 강박관념으로 시달리던 나를 건져준 것은 이 노래 한 소절이었다. 늘 행복하지만은 않아도 된다고 날 토닥거려주던 노래 한 소절이 나를 수렁에서 구해주었다. 스스로가 판 깊은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겨우 노래 한 자락이었다.
 

나는 그리 불행하지도 않고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나는 별 일 없이 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세상. 그게 내가 바란 전부였던 것이다.

by 천기누설 | 2009/06/23 17:34 | 세상; 헛소리 | 트랙백 | 덧글(4)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